통영 윤이상 기념관을 보며, 다음 여행지를 남해로 골랐다. 급히 숙소를 예약하고는 통영 해저터널에 갔고, 충렬사를 갈까 하다가 통영이 아닌 남해 충렬사南海 忠烈祠로 가기로 했다. 사전 지식이라고는 충무공 이순신忠武公 李舜臣의 유구遺軀를 한때 모셨던 가묘가 있다는 정도가 다였다. 그리고 통영 충렬사는 이미 몇 번 방문했었지만, 남해 충렬사는 가본 적이 없어서이기도 했다.
충렬사 근처에서 점심을 먹고 천천히 걸어서 올라갔다. 충렬사로 들어가는 마지막 갈림길 모퉁이에 비석이 보여서 다가가 봤다.
남해 척화비 (南海 斥和碑)

병인양요(丙寅洋擾 1866년)와 신미양요(辛未洋擾, 1871년)에 승리한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 1821~1898)이 전국에 척화비(斥和碑)를 세우도록 했다. 전국에 세워졌던 척화비는 흥선대원군이 러시아 공사관으로 납치 당하고, 세계에 대한 조선의 문호 개방을 계기로 대부분 철거 됐다고 한다. 이곳에 있는 남해 척화비는 당시 철거되지 않은 20여기 중 하나이다.
사각 받침돌 위에 몸돌이 있고 그 위에 지붕돌이 올려져 있는 형태를 하고 있으며 다음과 같은 문구가 쓰여 있다.
洋夷侵犯 非戰則和 主和賣國
서양 오랑캐가 침입해 오는데 싸우지 않으면 화친하자는 것이고 화친을 주장하는 것은 나라를 파는 것이다.
戒我萬年子孫
우리 만대 자손에게 경고한다.
남해 척화비(南海 斥和碑)
멀리 충렬사의 외삼문이 보인다. 충렬사 방향으로 들어서면 오른쪽으로 연이어 있는 비석을 볼 수 있다.
자암 김선생 적려유허추모 (自庵 金先生 謫廬遺墟追慕)
기묘사화己卯士禍 연루돼 남해에서 13년 동안 유배 생활을 한 자암(自庵) 김구(金絿, 1488~1534)를 추모하기 위해 세운 비碑이다. 그의 글씨는 인수체仁壽體로 불리며 안평대군(安平大君) 이용(李瑢, 1418~1453), 석봉(石峯) 한호(韓濩, 1543~1605), 봉래(蓬萊) 양사언(楊士彦, 1517~1584)과 함께 조선 전기 4대 명필로 불렸다 한다.

김구 선생의 자는 대유大柔, 호는 자암自庵으로 성종成宗 19년(1488) 서울 연희방燕喜坊에서 출생하였다. 약관 16세에 한성시에서 장원하고 20세에 중사마시中司馬試에 합격하여 진사進士가 되었다. 중종(中宗, 1488~1544) 때 정암(靜庵) 조광조(趙光祖, 1482~1519)에게 발탁되어 32세의 나이로 홍문관弘文館 부제학副提學에 올랐으나 기묘사화己卯士禍에 연루되어 남해에서 13년간 유배되었다. 조선전기 4대 서예가 중 1인인 그가 남해에서 유배 중에 저술한 '화전별곡花田別曲'은 일점선도一點仙島 남해의 아름다움을 표한한 경기체가이다. 이 비는 그의 6대손인 김만화金萬和가 남해현령南海縣令으로 재직하던 숙종肅宗 32년(1706)에 건립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출처: 안내판
그 옆에 있는 비석은 ‘가선대부 삼도통제사 이공태상지비’이다.
가선대부 삼도통제사 이공태상지비 (嘉善大夫 三道統制使 李公泰祥之碑)

이태상(李泰祥)의 본관은 덕수德水, 자는 내숙來叔으로 숙종肅宗 27년(1701)에 출생하였으며,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5대손이다. 이태상이 진주병마사로 재직중인 영조英祖 36년(1760)에 남해 충렬사를 참배하고 청해루淸海褸를 세웠다. 이 비는 1882년 전 판관 문경일의 감독하에 건립된 것으로 이순신장군의 전공을 기리고, 백성의 세금을 탕감해 준 선정을 칭송하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출처: 안내판
안내판이 뭘 말하려하는지 파악을 할 수가 없다. 외삼문을 향해 조금 더 걷다보면 오른쪽에 집이 하나 있다. 그런데 루는 2층을 누褸라고 하지 않나???
청해루(淸海褸)
제사에 필요한 물품을 보관하거나 헌관이 머물며 재계하고, 제사를 준비하는 공간이었으리라 예상한다고 한다.
바로 직전에 본 ‘가선대부 삼도통제사 이공태상지비’에 안내문에 써 있듯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5대 손인 이태상이 충렬사를 참배하고 세웠다고 한다.

청해루(淸海褸) 앞 한글충렬사비와 남해 충렬사 안내판
위당(爲堂) 정인보(鄭寅普, 1893~1950)가 짓고 서예가 일중(一中) 김충현(金忠顯, 1921~2006)이 한글로 쓴 충렬사비忠烈祠碑가 있다.


로량바다는리충무공전사하신데라여긔에충렬사를세우노라
출처: 충렬사비
이제 충렬사에 들어가 보자. 돌계단 위 외삼문이 보이고, 충렬사라는 현판이 보인다.
외삼문(外三門)
충렬사 현판이 걸려있는 외삼문. 외부에서 들어가는 첫 번째 문이다. 외삼문은 신삼문神三門이라고도 불리는데, 종묘 · 문묘 · 향교 · 서원 등의 출입문을 말한다. 가운데 문은 신이 다니는 길이고, 양옆이 사람이 다니는 길이다. 가운데 문의 경우, 평상시에는 닫혀 있으며 제사나 특정 시기에 열고, 헌관(獻官)만 출입한다.

당연히 오늘도 닫혀 있다.
외삼문을 들어서면 넓은 마당이 나온다. 마당 오른쪽 가운데에는 가파른 계단과 그 위로 내삼문이 보이고, 정면으로는 비문과 비석이 보인다. 담 너머로는 노량露梁 앞 바다가 보인다.
남해 충렬사비(南海 忠烈祠碑)


내삼문으로 오르는 계단 왼편에 넓은 비문이 보인다. 남해 충렬사비라고 쓰여 있는데 이게 비석인지 모르겠다. 비문은 동판 위에 쓰여 있는데, 1661년 (尤庵) 송시열(宋時烈, 1607~1689)이 짓고, 동춘당(同春堂) 송준길(宋浚吉, 1606~1672)이 썼다고 한다. 사진에 보이는 한글 번역은 1980년 11월에 (靑溟) 임창순(任昌淳, 1914~1999, 한학자)이 번역하고 죽헌(竹軒) 정문장(鄭文丈, 1943~, 서예가)이 썼다.
충렬사중건비(忠烈祠重建碑)

노량 앞바다가 시원하게 보이는 안쪽 담 앞에 있는 비석이다. 충렬사 중건重建에 참여한 이들의 이름이 적혀 있다.
이제 가파른 계단을 올라, 내삼문으로 들어가 보자.
내삼문(內三門)

외삼문과 같은 구조이다. 정결한 분위기 유지를 위해서 아무나 들어오지 못하게 경내에 만든 문이다. 내삼문 위에 걸린 현판은 1965년에 박정희(朴正熙, 1917~1979) 전 대통령이 쓴 것이라고 한다. 박정희 전 대통령의 글씨는 한 번 더 볼 수 있다.
충무공 이순신 묘비 (忠武公 李舜臣 廟碑) 비각(碑閣)
내삼문을 오르면 문 바로 앞에 비각碑閣이 있다. 그 안에 ‘유명 조선국 삼도수군통제사 증시 충무이공묘비有明 朝鮮國 三道水軍統制使 贈諡 忠武 李公廟碑’로 시작하는 충무공 이순신 묘비가 있다.
전라좌수사全羅左水使 이순신이 임진왜란辰倭亂 때 큰 공을 세워 수군통제사水軍統制使가 됐고, 원균(元均, 1540~1597)의 모함에 의한 관직 박탈과 복직, 노량해전露梁海戰에서 전사하시기까지 내용이 상세히 기록돼 있다.


비문은 1661년(현종顯宗 2)에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 1607~1689)이 짓고, 동춘당(同春堂) 송준길(宋浚吉, 1606~1672)이 썼으며, 1663년에 박경지(朴敬祉, 1610~1669년, 무신), 금포(錦浦) 김시성 (金是聲, 1602~1676년, 무신) 등이 세웠다고 한다.
비각에 걸린 보천욕일補天浴日이라 쓴 편액扁額 역시 1965년에 박정희 전 대통령이 썼다. 전설에서 유래한 성어成語로 하늘을 꿰매고 해를 목욕시켰다는 말이라고 한다. 의미는 큰 공적功績을 의미한다고 한다.
1598년에 명나라大明國 장수 진린(陳璘, 1543~1607)이 선조(宣祖, 1552~1608)에게 올린 글에 이순신 장군을 칭송하는 글에서도 볼 수 있다.
有經天緯地之才補天浴日之功
이순신은 천지를 주무르는 경천위지(經天緯地)의 재주와 나라를 바로 잡은 보천욕일(補天浴日)의 공로가
있는 사람이다.
출처: 명나라 장수 진린이 선조에게 올린 글(1598년)
충무공 이순신 사당 (忠武公 李舜臣 祠堂)

사당 정면 위패가 있고, 위에 영정이 모셔져 있다. 이 영정은 1953년 월전(月田) 장우성(張遇聖, 1912~2005, 현대 화가)이 그리고, 1973년에 정부표준영정政府標準影幀으로 지정된 것을 모사模寫한 영정이다. 원본은 현충사顯忠祠에 있다.
고종(高宗, 1852~1919) 때,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의 서원 철폐령書院毁撤令에 의해 없어졌던 것을 일제강점기日帝强占期였던 1922년 개인에 의해서 새로 건립했다고 한다.
충민공비(忠愍公碑)와 충무공비(忠武公碑)
이순신 사당을 바라보면 오른쪽에 충민공비忠愍公碑가 있고, 오른쪽에는 충무공비忠武公碑가 있다. 현령에 의해서 오른쪽의 충민공비가 만들어졌고, 충무공 시호를 받고 충민공비는 묻고 충무공비를 세웠다고 한다. 이 두 비석에 관해서는 다행히(?) 안내문이 있어서 그 내용을 옮기겠다.


충무공 이순신 가묘 (忠武公 李舜臣 假墓)
충무공비 뒤로 작은 일각문一覺門을 통해서 이순신 장군의 가묘假墓에 들어갈 수 있다.

장군께서 순국하시고 유구遺軀를 이곳에 가장假葬했다가 1599년(선조 32)년 2월 충청남도 아산으로 이장移葬하여, 가분묘假墳墓로 남게 됐다.
이순신 장군은 임진왜란의 마지막 전투 노량해전이 승리로 끝날 무렵인 1598년(선조 31) 음력 11월 19일 아침 관음포 앞바다에서 순국하였다. 장군의 주검은 관음포를 출발하여 이곳 충렬사에 잠시 초빈(草殯)하였다가 고금도를 거쳐 충청남도 아산으로 운구되어 안장되었다. 이 가묘는 당시 이순신 장군을 충렬사 부근에 임시로 안치한 사실을 기념하기 위하여 지역의 뜻있는 인사들이 조성한 무덤이다.
출처: 안내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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